고전인문학에서 성현의 지혜 찾기
치평요람 제89권 본문
치평요람(治平要覽)은 조선시대 정인지 등이 역대 사적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만한 사실을 모아 저술한 정치서입니다.
중국 주나라부터 원나라까지의 역사와
우리나라 기자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하여 1445년 150권으로 완성했습니다.
치평요람 제89권 당(唐)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0년] 발췌
이사도(李師道)가 동도(東都)에다 유후원(留後院)을 설치해 놓고 암암리에 군사 수백 명을 들여보낸 다음
궁궐을 불태우고 군사를 풀어 약탈하기로 모의한 뒤에 소를 잡아서 군사들에게 먹였다.
그 이튿날 이사도가 거사하기 직전에 그중 어떤 사졸이 동도유수(東都留守) 여원응(吕元膺)에게 찾아가 고변하였다.
여원응이 군대를 출동하여 포위하자, 적도들이 돌출하여 산을 향해 달아나니, 도성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그때 유수의 병력이 적고 약하였으나 여원응이 황성문(皇城門)에 앉아 부대를 지휘하며 의기가 태연하였으므로
도성의 사람들이 그에게 힘입어 안정되었다.
동도의 서남쪽은 전부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오로지 사냥만 하며 살고 있으므로
사람마다 날래고 용맹하였는데〔人皆趫勇〕 그들을 산붕(山棚)이라고 불렀다.
여원응이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 많은 현상금을 걸어놓고
공고한 지 며칠이 지나 어떤 산붕이 도적을 보고 달려가 그의 동료들을 불러 모은 다음
관군(官軍)을 데리고 가 일제히 포위하여 체포하였다. 도적을 조사해 보니,
그들의 두목은 바로 중악사(中岳寺)의 중 원정(圓淨)이었는데,
그는 옛날 사사명(史思明)의 장수로 용맹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원정이 이사도에게 건의하여 이궐현(伊闕縣)과 육혼현(陸渾縣)의 산 사이에 전지를 많이 사들인 다음
산붕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살면서 경작해 의식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자가진(訾嘉珍)과 문찰(門察) - 자(訾)도 성(姓)이고, 문(門)도 성이다. -
두 사람이 암암리에 자기의 부하를 거느리고 가 원정에게 넘겨주며 통솔하도록 하였다.
원정이 이사도가 지급한 돈 천 만 전(錢)을 가지고 외면상으로는 불광사(佛光寺)를 짓는 체하면서 패거리를 모아 음모를
정한 다음 자가진 등으로 하여금 낙양성(洛陽城) 안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원정은 산중에서 횃불을 신호로 보내어
두 현 - 두 현은 이궐과 육혼이다. - 의 산붕들을 소집해 성안으로 들어가 협조하기로 약속하였다.
원정의 나이 그때 80여 세였는데, 체포한 자들이 그를 붙잡아 놓고 그의 다리를 향해 쇠망치를 힘껏 내리쳤으나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자 원정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쥐새끼들아, 남의 다리도 부러뜨리지 못하면서
감히 건아(健兒)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하고 스스로 다리를 펴놓고 쇠망치를 내리쳐 부러뜨리도록 하였다.
원정이 형벌을 받기 전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대사(大事)를 망친 바람에
낙양성 안에 피가 흘러가게 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와 같이 죽은 패거리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왕종이 군대를 사방으로 보내어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니,
유주(幽州)ㆍ창주(滄州)ㆍ정주(定州) 3진(鎭)이 모두 괴로워한 나머지 서로 앞을 다투어
상소를 올려 왕승종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헌종이 허락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동평장사(同平章事) 장홍정(張弘靖)이 말하기를,
“두 곳의 토벌을 동시에 거행할 경우에는 국력이 지탱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전력을 기울여 회서를 평정한 다음에 항기(恒冀)의 왕승종을 정벌하소서.”라고 하였으나,
헌종이 왕승종의 토벌을 중지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홍정이 재상의 직무를 해임해 줄 것을 청하니, 헌종이 허락하였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료는 수익창출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