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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인문학에서 성현의 지혜 찾기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이 수입 된 이래로 줄곧 문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려초기까지 변체문이 주로 쓰였습니다. 한국 한문학의 시조라 불리는 최치원이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로다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하여 성공적인 문학 활동을 한 사람이 김부식입니다. 여한시바문초에 수록 된 고문체에 대한 김부식의 풍부한 문장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진 삼국사표(進三國史表) 신 김부식(金富軾)은 아룁니다. 옛날의 열국(列國)도 각기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진(晉)나라의 《승(乘)》과 초(楚)나라의 《도올(檮杌)》과 노(魯)나라의 《춘추(春秋)》는 한가지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해동(海東) 삼국은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사실이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노신(老..

고려말 조선초기 1397년 정도전의 심봉집 문집 간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에 휩쓸려 처형되면거 모든 판본이 흩어졌다가 조선의 7대왕 세조 때 정도전의 증손 정문형에 의해 파편을 복구하고 서문을 붙여 간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정도전이 살았던 한 시대를 이해할 수 있고 조선의 건국과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불씨잡변은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불씨 윤회의 변[佛氏輪廻之辨]입니다. 삼봉집(三峯集) 불씨잡변(佛氏雜辨) / 불씨 윤회의 변[佛氏輪廻之辨] 사람과 만물이 생생(生生)하여 무궁한 것은 바로 천지의 조화(造化)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함에 음(陰)..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의 시, 사서문변, 사론, 서 등을 수록한 문집이 담한서입니다. 특히 사서문변에서는 유교의 경전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의 경문과 주석을 열거하고 질문하여 홍대용의 철학을 더하여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아래 내용은 대학문의(大學問疑) 전구장(傳九章)에 대한 해석을 적은 문집 내용입니다. 효(孝)와 제(弟)와 자(慈) 이 세가지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이 잘 표현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서 문변(四書問辨) / 대학 문의(大學問疑) 전구장(傳九章) 발췌 본래 위에서 행(行)하면 아래서 본받아 기약함이 없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인데, ‘여보적자(如保赤子)’에 이르러는 도리어 미루어 행하는 것의 큰 것으로 삼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나의 생각은 이 조목..

하곡집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였던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문집입니다. 내집에서는 사서삼경 등 경학에 대한 저술을 다루었고 외집에서는 역학, 천문, 지리를 모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핸드폰, 이메일, 인터넷 망의 발달로 의사소통와 정보공유가 매우 빠릅니다. 이에 반해서 조선시대에는 서신교환, 편지, 서찰 등 제한적인 통신으로 가치관과 철학을 교류한 듯 합니다. 송우재에게 올리는 문목에서는 '답서(答書)에 이렇게 말하였다.'는 표현이 자주 있습니다. 문답 서신의 과정 을 통해서 학문과 주어진 현실 적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옛 말이 있습니다. 옛 것이 무조건 옳지는 않지만 수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적극 받아들여 내것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현대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

계원필경은 남북국 시대 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문집입니다.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로 유학하여 관리가 되었고 이 때 집필한 여러 시문을 신라로 돌라온 뒤에 886년에 책으로 엮어 왕에게 헌상하였습니다. 최치원이 관리로 있으면서 작성한 여러 공식 문서는 당나라 말기의 역사를 보충해 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최치원은 12세의 나이로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학문을 익히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빈공진사과에 급제한 뒤 낙양을 돌아다니면서 붓으로 먹고사는 시기에 태위에게 진정하며 올린 시로 추측합니다. 일변(태양 주변) 해뜨는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후원자를 찾아다니는 상황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제천(태위 고변)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으며 타국에서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엿볼 수 있..

서애집은 조선 중기에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고 징비록을 저술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인 유성룡(1542~1607)의 문집입니다. 파사성은 임진왜란 시기에 도성의 상류를 견고히 하고자 파사성을 완성을 기뻐하며 만든 시입니다. 파사고성은 여주 아래쪽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적이 한쪽은 죽산으로부터 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진출하였고 다른 한쪽은 충주로부터 여강을 건너 서울 동쪽으로 진출하였었습니다. 파사성을 보수하여 견고히 하고 싶었으나 공사가 커서 백성이 수고스러울까봐 황해도 승군 총섭(僧軍摠攝) 의엄(義嚴)으로 하여금 성을 쌓도록 하였고 수년만에 성이 만들어졌습니다. 누로(樓櫓) 및 군기가 모두 갖추어져 하나의 관방(關防)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

허균(許筠)(1569~1618)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자 조선시대 문신입니다. 조선시대 여작가로 유명한 허난설헌의 남동생이기도 합니다. 벼슬은 전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 역으로 반역을 도모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에 위치한 광원루는 춘향이와 이몽룡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 곳 광원루에서 석양이 지는 저녁에 타양 살이에 대한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역사를 살펴보면 풍류와 즐거움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광원루(廣遠樓)에 오르다 高閣憑風逈 / 바람에 의지하여 높은 집 툭 트이니 閑登不待招 / 한가..

포은 정몽주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습니다. 포은선생시권 서문은 권채(權採)가 작성한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세종 시대의 문신이자 집현전 학자인 권채(權採)(1399~1438)는 학문도 깊고 매사에 반듯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아래 내용은 권채(權採)가 오천(烏川)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에 대하여 표현을 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의 사직과 관련되어 "충의"라고 표한한 부분은 역사적으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태종대왕이 충신전에 넣도록 한 부분과 문집을 작성하는 모습 또한 앞으로 좀 더 관심있게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 대표 학자 포은 정몽주는 절개와 충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포은선생시권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