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인문학에서 성현의 지혜 찾기
통색촬요 제1권 <세조~중종> 본문
통색촬요는 각 시대별로 서얼허통(庶孽許通)에 관련되는 전교(傳敎)·소차(疏箚)·문답(問答) 등을 수록하였습니다.
제1권은 태종 부터 숙종까지 글들이며
이번에는 중종까지의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통색촬요 제1권 <세조~중종>
통색촬요 제1권
태종대왕(太宗大王)
태종대왕 15년(1415) 서얼(庶孼) 자손(子孫)은 현직(顯職)에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세조(世祖)
세조6년(1460) 예문관 봉교 정난종(鄭蘭宗) 등이 상소하였다. 그 내용에,
“본조(本朝)에서 문무과(文武科)를 설행할 때에, 만약 선대(先代)에 하자가 있거나 서얼인 경우에는 가계가 비록 훈공을 세운 집안이거나 재능이 비록 준수할지라도 응시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지금 안유(安愈)와 안혜(安惠)는 그의 아비가 부원군 조준(趙浚)의 서녀(庶女)를 아내로 취하여 낳은 아들이니, 안유와 안혜 등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데, 이제 특별히 허락하셨습니다. 내리신 명을 거두어 과거 제도를 엄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낼 때에는 본래 누구는 귀하고 누구는 천하게 차등을 두지 않는다. 태종조에 이미 허통(許通)하셨고, 지금 공신(功臣)이므로 영구히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락하였으니, 어찌 본계(本系)에 구애받겠는가. 내가 사사로움을 두는 것이 아니다.”
성종(成宗)
성종5년(1474) 장령 이숙문(李淑文) 등이, 최적(崔適)의 위장(衛將) 제수를 개정(改正)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영사(領事) 홍윤성(洪允成)에게 하문하니, 홍윤성이 대답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최적에게 무과(武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자 하셨는데, 신이, 최적은 최보로(崔甫老)의 기첩(妓妾) 소생이므로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고 아뢰었더니, 세조께서 ‘인재(人才)를 키우는 것은 임금의 일이다. 지금 북쪽 오랑캐가 발호하는데, 최적은 무예가 출중하다.’라고 하시고는 결국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강서(講書)할 때에 최적이 한 자도 해석하지 못하자, 세조께서 하문하기를 ‘전투 중에 뒷걸음치는 자를 베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시니, 최적이 아뢰기를 ‘사졸(士卒)들이 놀라고 의혹스러워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분히 통(通)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학문을 아니한 자는 비록 무재(武才)가 있더라도 가벼이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잘 요량하겠다.”하였다.
중종(中宗)
중종 때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건의하기를,
“중국(中國)은 인물이 본래 많은 데다 발탁해서 쓰는 것도 쉬운데, 우리나라는 인물이 본래 적고 또 서얼을 차별하는 국법이 있습니다.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간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조정이 인재를 쓰는 것이 이와 같이 편협합니다. 신은 삼가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서얼 가운데에도 쓸 만한 사람이 없지 않으니 인재를 가려서 임용하소서. 벼슬이 높아진 뒤에 혹 적손(嫡孫)이 잔폐해진 것을 틈타 만약 명분을 혼란시키는 죄를 짓는 자가 있으면, 동성(同姓)은 6촌까지, 이성(異姓)은 4촌까지 한정하여, ‘서얼로서 적손을 능멸한 자를 처벌하는 법규’를 엄하게 세워, 예조(禮曹)에 신고할 수 있도록 하소서. 적손을 능멸한 서얼은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자가 아니면 종신토록 금고하여 사적(仕籍)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큰 공로가 있는 자라면 등급을 낮추어 형률을 시행하소서. 그리하면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는 일과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 둘 다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곤(南袞) 일파가 이것을 ‘민심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해서 반역을 도모하였다.’라고 하며 ‘나뭇잎 글자’의 재앙을 얽어 하나의 죄안을 만들었고, 서얼의 진출을 막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조야문록(朝野聞錄)》
중종 38년 계묘년(1543) 태학(太學) 유생이 치좌법(齒坐法)을 행하였다. 당시에 영남 유생 배신(裵紳)과 이제신(李濟臣)이 강개하고 옛사람의 풍도를 좋아하였는데 성균관에 노닐면서 의론(議論)을 창도하기를 “선행 실천의 첫머리가 되는〔首善〕 장소에 어찌 장유(長幼)의 차서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나이순으로 앉아야 한다.” 하였다. 드디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하재(下齋)에서 시행하였다. 또 미루어서 상사(上舍)에도 시행하고자 하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는 식당(食堂)에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 크게 소리치기를 “서얼 배신은 속히 나오라!” 하였다. 식자(識者)들이 놀라워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이 일을 관장(官長)에게 질문하니, 대사성 이준경(李浚慶)과 사성 송세형(宋世珩)은 옳다고 하였고, 유독 성균관 지사 성세창(成世昌)은 그르다고 하며 말하기를 “공자의 문하에도 나이순으로 앉는 법이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진사(進士) 홍인우(洪仁祐)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네 사람이 포부〔志〕를 말할 적에 증점(曾點)이 가장 나중에 대답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이로 보면 증점이 두 번째로 대답을 했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공자 문하에서 나이를 존중했던 증거가 아닌가. 재상(宰相)인데도 말이 이와 같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하였다. 나이순으로 앉는 법이 드디어 폐지되었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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