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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인문학에서 성현의 지혜 찾기

고려말 조선초기 1397년 정도전의 심봉집 문집 간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에 휩쓸려 처형되면거 모든 판본이 흩어졌다가 조선의 7대왕 세조 때 정도전의 증손 정문형에 의해 파편을 복구하고 서문을 붙여 간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정도전이 살았던 한 시대를 이해할 수 있고 조선의 건국과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불씨잡변은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불씨 윤회의 변[佛氏輪廻之辨]입니다. 삼봉집(三峯集) 불씨잡변(佛氏雜辨) / 불씨 윤회의 변[佛氏輪廻之辨] 사람과 만물이 생생(生生)하여 무궁한 것은 바로 천지의 조화(造化)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함에 음(陰)..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의 시, 사서문변, 사론, 서 등을 수록한 문집이 담한서입니다. 특히 사서문변에서는 유교의 경전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의 경문과 주석을 열거하고 질문하여 홍대용의 철학을 더하여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아래 내용은 대학문의(大學問疑) 전구장(傳九章)에 대한 해석을 적은 문집 내용입니다. 효(孝)와 제(弟)와 자(慈) 이 세가지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이 잘 표현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서 문변(四書問辨) / 대학 문의(大學問疑) 전구장(傳九章) 발췌 본래 위에서 행(行)하면 아래서 본받아 기약함이 없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인데, ‘여보적자(如保赤子)’에 이르러는 도리어 미루어 행하는 것의 큰 것으로 삼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나의 생각은 이 조목..

하곡집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였던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문집입니다. 내집에서는 사서삼경 등 경학에 대한 저술을 다루었고 외집에서는 역학, 천문, 지리를 모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핸드폰, 이메일, 인터넷 망의 발달로 의사소통와 정보공유가 매우 빠릅니다. 이에 반해서 조선시대에는 서신교환, 편지, 서찰 등 제한적인 통신으로 가치관과 철학을 교류한 듯 합니다. 송우재에게 올리는 문목에서는 '답서(答書)에 이렇게 말하였다.'는 표현이 자주 있습니다. 문답 서신의 과정 을 통해서 학문과 주어진 현실 적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옛 말이 있습니다. 옛 것이 무조건 옳지는 않지만 수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적극 받아들여 내것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현대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

몽유연행록은 이유준이 1848년 동지정사 사절단 수행원으로 다녀오며 쓴 연행일기입니다. 표질(表姪 외조카)인 학사(學士) 윤근지(尹近之)가 서장관(書狀官)의 개인수행원이라 할 수 있는 반당의 직책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유준은 연행의 여정을 봉래산을 보고 다녀오는 길의 꿈처럼 연경 여정을 꿈에 비유하였습니다. 몽유자라고 자호를 붙인 이유와 연행일기를 몽유연행록이라 칭한 이유가 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 자서 내가 신묘년(1831, 순조31) 봄에 봉래산(蓬萊山)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한번 꿈을 꾸었는데, 연경(燕京)에 가서 유람을 하는 것이었다. 깨어난 뒤에도 산천이 선명하게 그대로 기억이 났다. 이로 인하여 마음속으로 스스로 말하기를, “봉래산은 우리나라 강역 안에 있으니 만약 ..

관연록은 1804년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에 다녀온 일기입니다. 저자 김선민(金善民 1772~1813)은 소과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경서와 시문에 뛰어났으나 관계 진출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시를 짓고 싶었는데 정사에 동행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관연록 서전은 어찌나 빛나고 아름다운지 강한(江漢)의 주옥과 같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앞으로 기대가 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관연록 서전(觀燕錄 序前) 온 천하의 사물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은 사물로써 사물을 묶어 사물이 간혹 이끄는 터라 이를 일러 ‘물관(物觀)’이라 한다. 지혜〔智〕로써 보는 것은 천하의 사물을 사물로 여기면서도 천하의 사물을 사물로 보지 않는다. ..

경오연행록은 청나라 연경으로 사신이 다녀온 기행문입니다. 당시 명나라가 건재한 상황에서 청나라 연경으로 떠나가게 된 사유는 김인술을 의율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김인술은 함경북도 유원진(柔遠鎭)의 토병이었습니다. 그가 금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 청나라 사람과 베와 쌀을 교역하기로 약속했다가 청나라 사람이 이를 어기자 다툼 끝에 총 5인을 살해하였습니다. 청나라에서 이를 온성부(穩城府)에 알려왔고 온성부는 즉시 예부(禮部)에 자문을 보냈습니다. 조정에서는 북도 안핵사로 서지수(徐志修)를 파견하여 감사 정익하(鄭益河)와 병사 구성필(具聖弼)과 함께 이 사건을 안핵하게 하였습니다. 김인술 등 7인은 이듬해 윤 5월에 국경에서 효시되었고, 양국의 사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음력 7월에 동지사은 겸 진주사 일행이..

계원필경은 남북국 시대 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문집입니다.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로 유학하여 관리가 되었고 이 때 집필한 여러 시문을 신라로 돌라온 뒤에 886년에 책으로 엮어 왕에게 헌상하였습니다. 최치원이 관리로 있으면서 작성한 여러 공식 문서는 당나라 말기의 역사를 보충해 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최치원은 12세의 나이로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학문을 익히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빈공진사과에 급제한 뒤 낙양을 돌아다니면서 붓으로 먹고사는 시기에 태위에게 진정하며 올린 시로 추측합니다. 일변(태양 주변) 해뜨는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후원자를 찾아다니는 상황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제천(태위 고변)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으며 타국에서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엿볼 수 있..

서애집은 조선 중기에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고 징비록을 저술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인 유성룡(1542~1607)의 문집입니다. 파사성은 임진왜란 시기에 도성의 상류를 견고히 하고자 파사성을 완성을 기뻐하며 만든 시입니다. 파사고성은 여주 아래쪽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적이 한쪽은 죽산으로부터 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진출하였고 다른 한쪽은 충주로부터 여강을 건너 서울 동쪽으로 진출하였었습니다. 파사성을 보수하여 견고히 하고 싶었으나 공사가 커서 백성이 수고스러울까봐 황해도 승군 총섭(僧軍摠攝) 의엄(義嚴)으로 하여금 성을 쌓도록 하였고 수년만에 성이 만들어졌습니다. 누로(樓櫓) 및 군기가 모두 갖추어져 하나의 관방(關防)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